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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남자의 관례복

by HaDa, 하다 2021. 6. 1.

관례의 뜻과 의미

관례란 사례(四禮)의 첫 단계에 해당되는 통과 의례였습니다. 남녀 모두 관례라고 하지만 특히 여자의 관례는 계례(锌禮)라고도 했습니다. 관례는 성인이 되는 도리를 일깨우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한 의례로서, 요즘의 성인식에 해당됩니다.

 

관례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대부터 미혼자와 기혼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 모양을 달리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오래전부터 관례의 유형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남자의 관례

남자는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이 되면 아이의 옷을 벗기고 상투를 틀어 어른의 관(冠)과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리고 관례에 초대된 빈객은 관례를 치른 아이에게 자(字)를 지어 주었습니다. 여자도 열다섯 살이 되면 낭자머리에 비녀를 꽃아 준 후 어른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옷을 바꾸어 입는 과정을 통해 좀더 성숙한 성인이 될 것을 다짐하는 것이죠. 그러나 조혼 풍습 때문에 예서에 제시된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관례를 치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여자의 계례

대체로 남자는 혼인 전에 관례를 치렀던 반면 여자는 혼인 후에 계례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관례는 한 번의 단계로 끝났지만 남자의 관례는 삼가례(三加禮)라고 하여 초가(初加), 재가(再加), 삼가(三加)라는 세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 초가례는 어린 뜻을 버리고 새로운 어른의 삶을 다짐하며 덕을 쌓도록 지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재가례는 사회에 공헌하여 경사스러움을 받아서 부모를 즐겁게 하며 오래도록 모시라는 효 사상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삼가례는 온 집안이 번영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이 되어 영화를 누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상투틀고 갓 쓰는 총각

'상투 틀고 갓 쓴다'는 말은 어른이 된다고 하는 남자 관례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관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사」 에서 처음 보입니다. 965년 (광종 16)에 왕자가 원복(元服)을 입는 예식을 치렀으며 1121년 (예종 16) 봄 정월에도 왕세자의 관례를 거행하고 백관이 글을 올려 축하했습니다.

 

주자(朱子)의 「가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조선 에서는 건국 초부터 관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1404년(태종 4) 에 공신과 종친의 후손들에게 「가례」 의 내용에 따라 열다섯 살 에 관례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초에는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관례를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조 때에도 종실 자녀에서부터 사대부의 자녀에 이르기까지 열세살이 되면 관례를 행하되, 관례를 치르지 않은 자는 입학을 허락하지 말자는 등의 제재를 함으로써 관례를 실행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사대부가 자녀들의 관례는 중종 때조차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1534년(중종 29)에 상류층에서만 관례를 행하기 시작 하여 선조 때 비로소 사대부가 자녀들의 관례가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영조대에도 관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관례가 사치스러워짐에 따라 부자처럼 관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관례의복: 초출복

관례를 치를 사람이 처음 등장할 때 입는 옷인 초출복(初出服)은 어린아이가 평상시 입는 평상복을 말합니다. 머리 모양은 땅아 내린 경우가 대부분 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의례를 중시하는 집안에서는 중국 어린아이의 머리 모양인 쌍계(雙譬)를 하기도 했습니다. 관례를 치를 동자는 채색 옷을 입는데 동자가 화려한 옷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색이 고운 사규삼을 즐겨 입었습니다.

 

초가 때는 관직이 없는 자의 옷이자, 선비들의 옷으로 인정되었던 심의(深衣)에 치포관(繼布冠)이나 복건을 착용하였습니다. 치포관이나 복건은 검은 옷 감으로 만들었으며 심의 역시 대포(大布), 마포(麻布) 등의 소박한 옷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렇듯 심의를 입는 초가를 통해 고고한 선비의 자세를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김이안(金履安, 1722~1791)의 초상화에서 복건을 쓰고 심의 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재가 때에는 성인의 옷인 갓에 도포를 입었습니다. 이는 대장부로서의 기본 자세를 깨우쳐 주기 위한 단계에 적절한 옷입니다. 그리고 삼가 때에는 대부(大夫)의 옷인 공복이나 생원 진사 창방(唱榜) 때 입는 옷인 난삼(欄杉)을 입도록 하였습니다. 삼가에 난삼을 입는 것은 생원이나 진사 합격을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관리로서의 몸가짐을 익히고자 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윤봉구(尹鳳九, 1725~1775)의 초상화에서 동파관(東坡冠)에 난삼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관례

다른 의례복도 그렇듯이 관례복 역시 시대에 따라 옷의 종류나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관례의 시기나 구체적인 절차, 관례의 단계에 따라 입는 옷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한 삼가의 관례 절차를 모두 따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간략하게는 사대부의 기본적인 옷이라고 할 수 있는 갓과 도포, 세조대, 운혜 일습(一習)으로 갈아입는 한 번의 단계로 관례를 치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을 갈아입는 과정은 태어나 성인으로서 이루어 야 할 목표와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계별로 옷을 바꾸어 입는 경우, 각 단계별로 격을 높여 가며 입는 원칙은 항상 지켜졌으며 아울러 그 시대에 그 옷이 지닌 의미를 적용하여 관례의 단계별로 유지 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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