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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조선시대 상투

by HaDa, 하다 2021. 6. 3.

상투

상투의 의미

상투란 머리카락을 끌어 올려 정수리 위에 틀어서 감아 맨 것입니다. 상투를 트는 것은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며 남성으로서의 위엄 또한 과시하게 됩니다. 상투를 틀지 않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존칭도 생략하여 정중한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도 상투를 틀었을 경우 남성이 받는 존경과 의무를 부여받고,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바치고 기원하는데 한 몫을 차지하며, 조상들의 영혼도 그들에게 영광을 부여할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보호하며 축복합니다. 더욱이 상투를 틀지 않고는 관습적으로 공직에도 오를 수 없었습니다. 상투는 조선인들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어 상투를 틀어야 관명(冠名)으로 불리며 족보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상투 패션

상투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닙니다. 한양의 멋쟁이들은 상투를 멋지게 만들기 위하여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을 면도하는 수고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 '백고친다'고 하고 이때 사용하는 면도칼은 '백고칼' 이라고 하여 따로 간수했습니다. 길이 5~7.5cm, 두께 2.5cm로 수직이 되게 틀어서 감아 땠을 때 가장 이상적인 크기의 상투가 됩니다. 따라서 머리술이 많으면 정수리 부분을 면도하여 상투의 크기를 알(卵)보다 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상투를 '알' 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한양의 멋쟁이들은 기성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자신의 개인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항상 상투의 크기를 계란보다 크지 않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동곳

그럼 동곳은 어떻게 했을까요? 상투를 틀고 머리를 고정시키는 동곳은 기혼 남성의 수식물(首飾物)로 관자(貫子)와 같이 품계를 구분하는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상류 계급에서는 금, 은, 밀화, 호박, 마노, 비취, 산호, 옥 등으로 만들어 꽃아 장식하였습니다.

 

 

망건

조선 시대 남자는 머리를 어떻게 정리하였을까요? 먼저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머리 위에 상투를 튼 다음 상투의 꼭대기 부분에 동곳을 꽃고, 흩어져 내린 머리카락은 살쩍밀이라는 얇고 작은 막대기로 밀어 넣어 망건을 단단히 둘러매고 당줄을 관자에 걸어서 상투에 동여매었습니다. 망건은 서양의 헤어밴드와 같은 목적으로 뒷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하여 갓 바로 밑 이마에 밀착시켜 묶는 띠의 일종입니다. 망건은 말총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엮을 때 무늬를 넣어 짜기도 하였습니다. 너비가 3.8cm 정도인 망건을 이마의 중간 쯤까지 내려서 머리 주위에 동인 다음 돌려서 뒤로 단단하게 묶기 때문에 매우 아프고 이마 주위에 깊이 자국이 남습니다. 한 계절이 지나면 영원히 자국이 남는데, 거의 머리 주위에 3mm 정도의 자국이 생깁니다. 처음 망건을 착용하게 되면 두통이 올 정도로 고통이 심하지만 한 달쯤 쓰고 나면 아픔도 가시고 멋진 갓이나 관을 쓸 수 있는 완벽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한편, 작은 뼈나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자그마한 칼처럼 만든 살쩍밀이는 원래 몸단장 용구로 머리가 흐트러졌다거나 삐쳐 나왔을 때 머리칼을 밀어 넣어 모양을 고정시키는 데에 썼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심하게 아플 때 망건 밑으로 집어넣어 조임을 완화시키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많은 장신구가 대부분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조선의 망건을 더 선호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죠. 얇은 비단 종류인 사(紗)에 검정 칠을 한 중국의 망건은 상투 부분만 뚫려 있는 모자 형태였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들어와 이마만 묶는 밴드 형태의 조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17세기 이 후에는 조선식 망건이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유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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