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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돌잔치 전통의복: 남자 돌빔

by HaDa, 하다 2021. 5. 31.

돌잔치에서 중요한 것은 잔칫상의 '떡' 입니다. 오래전부터 무병장수하라고 돌상에는 수수경단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점쳐 보기 위한 '돌잡이' 행사였습니다. 활을 집으면 장군감이요, 책을 집으면 선비로, 아니면 과거 급제하여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재미삼아,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미래를 예측하였습니다.

돌빔의 뜻

돌쟁이가 입는 돌빔도 무병장수와 부귀권세를 기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축복받은 주인공답게 잘 차려입었는데, 이를 '돌빔' '돌치레'라고 하였습니다. 빔' 은 '비음' 이라고도 하는데 '비음'은 꾸민다는 뜻의 '비오다' 라는 옛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명절이나 잔치 때 새 옷으로 치장하는 일을 말합니다. '돌빔' 은 첫 돌을 맞아 좋은 옷으로 꾸며 아기를 보여주는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빔에 대한 기록은 사대부가의 경우에도 흔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의례에 비해 비중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돌빔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자료는 대부분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의 것입니다. 그 밖에는 19세기에 세간에서 유행했던 평생도병과 같은 회화 자료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평민의 돌빔 모습

평생도병에 등장하는 주인공 돌쟁이는 바지와 색동저고리에 배자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염낭을 매단 돌띠를 배자 위에 두르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사한 굴레를 쓰고 있습니다. 돌빔으로 특별한 종류의 옷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고운 색의 좋은 옷감으로 정성스럽게 새로 지은 옷을 입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입혀서 아기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고 지켜주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열은색 풍차바지에 옥색이나 분홍색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개화기 이후에는 그 위에 남색 조끼와 연두색 길에 색동 소매를 단 마고자를 덧입었습니다. 또 형편에 따라 까치두루마기나 오방장두루마기를 입 고 그 위에 전복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는 돌빔 양식은 1884년(고종 21) 갑신 의제 개혁 때 소매 넓은 도포 등의 옷을 없애는 대신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고 실띠를 두르도록 변경한 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이므로 사실 그리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10년 후인 1894년부터는 전복을 입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는 돌빔 양식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왕실의 돌빔모습

돌빔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기는 왕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791년 (정조 15) 6월 18일이 원자의 첫돌이었는데 사유화양건(四族華陽巾)을 쓰고 자라겹삼(紫羅挟衫)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의젓하였다고 하였으니 18세기 왕실에서는 건(巾)과 삼(衫)을 돌빔으로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말인 1898년(광무 2) 9월 영왕의 돌날에 올린 복식 중에는 옥판(玉板)과 석응황(石雄黃)이 장식된 아청색 복건(幅巾)에 남송색 사규삼, 양남색 쾌자, 분홍색 두루마기, 분홍색 저고리, 양남색 배자, 흰색 바지, 오목버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선 1897년 10월 15일 삼칠일에는 아청색 굴레에 양남색 배자, 분홍색 두록색 옥색 저고리에 흰색 바지, 오목버선 등이 마련되었습니다. 삼칠일에 입는 옷과 돌때 입는 옷을 비교해 보면 삼칠일에는 굴레를 쓰고 짧은 옷을 입은 반면에 돌 때는 복건에 사규삼이나 쾌자, 두루마기 등과 같은 길이가 긴 옷이 마련된 것이 다른 점입니다. 돌 때면 성인과 같은 포 종류의 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립 고궁 박물관에는 영왕의 돌빔은 아니지만 왕손인 그의 아들이 어렸을 적에 입었던 옷들이 소장되어 있어 당시 왕실 남자아이 옷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빔의 형태

복권과 호건, 굴레

돌쟁이 머리에 쓰는 관모 중에는 검정 비단으로 만든 복건과 호건(虎巾), 굴레가 있습니다. 가장자리와 끈 부분에는 '수부귀(壽富貴)' '다남자(多男子)' 등의 좋은 의미를 지닌 글자나 무늬를 금박으로 찍어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복건은 검은 색상의 옷감 한 폭을 길이로 반을 접어 만든 것인데 이마 부분에는 옥판이나 석웅황 등의 장식물을 달았습니다.

 

호건은 복건과 달리 정수리 부분이 트였으며 좌우에 귀를 달고 눈썹과 눈, 코, 입, 수염 등을 수놓아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을 나타냈습니다. 

 

한편 굴레는 남자아이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도 썼던 것으로, '다리'라고 하는 작은 조각 여러 개를 연결해 머리를 감쌀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앞다리와 끈, 댕기, 정수리 복판 부분의 색상으로 남아와 여아를 구별하였습니다. 남자아이는 양쪽 볼에 해당되는 좌우 앞다리와 댕기, 정수리의 복판을 흑색으 로 하였으며 끈은 남색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들을 볼 때 이러한 규정을 반드시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규삼과 두루마기

남자아이의 겉옷에는 사규삼과 두루마기가 있습니다. 두루마기를 어린아 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층에서 입었던 옷이라고 한다면 사규삼은 아이들이 관례 전까지만 입었던 옷입니다. 특히 예서(禮書)에는 관례를 치를 어린아이가 입는 초출복(初出服)이니, 어린아이로서의 마지막 옷인 셈입니다. 두루마기는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서민들이 입었던 옷이라고 하는데 「가례 (家禮)」를 통해 그 이름이 일찍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대부가에서 입기 시작한 것은 후대의 일로, 이 옷을 입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18 세기 이후부터 볼 수 있습니다.

 

사규삼은 앞 중심에서 마주 닿는 대금형 옷으로 끝을 굴린 곧은 깃을 달았습니다. 깃 끝 아래로 두 쌍의 단추를 달아 여였으며 소매는 넓고 무 없이 양옆이 트인 옷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말기의 유물 중에는 뒤가 트이지 않은 것도 있지만 뒤트임이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깃과 수구, 옷 가장자리를 따라 검정이나 붉은 선 장식을 둘렀는데 선 위에 금박을 찍어 더욱 화려하 게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록색이나 남색, 분홍색 등 화사한 색상을 사용하 였는데 아이들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허리에는 주로 붉은색의 세조대(細條帶)나 돌띠, 전대(戰帶) 등을 둘렀습니다.

 

한편 19세기 말에 흔히 입기 시작한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고 양옆이 트이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아이의 두루마기에 는 어른의 두루마기와는 달리 다양한 색상의 옷감을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색동 소매의 두루마 기를 애용하였습니다. 색동두루마기는 까치두루마기라고도 하였는데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때때옷' 이라고도 하고 '까치 까치 설날'같은 명절에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색동 소매를 달지 않은 보통 두루마기일지라도 어른과 달리 색상은 선명하고 화려한 옷감을 사용하였습니다.

 

연두색 길에 노란 섶, 자주색이나 빨간색의 소매와 무, 그리고 남색의 깃과 고름의 오방색(五方色)으로 만든 오방장두루마기는 아이의 모습을 더 욱더 사랑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남자아이의 색동두루마기와 오방장두루마기에는 대체로 남색 고름을 달았습니다. 두루마기의 깃과 고름, 바지와 버선의 끈 등에 쓰는 남색은 여자아이의 옷과 구별하기 위한 색상으로, 마치 남자아 이의 상징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두루마기에는 왼쪽 옷자락에 긴 고름을 달아 허리에 한 번 감아서 고름을 매는데 일명 '돌띠 고름' 이라고 합니다. 아동복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죠. 두루마기 위에는 남색 전복을 입고 붉은색 돌띠나 전대를 매었습니다. 전복은 등솔이 길게 트이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본래는 군복(軍服)의 한 종류였습니다. 어린아이의 전복에는 어른의 것과는 달리 깃과 싶, 밑단 등에 수복강 녕(壽福康寧)이라는 글자나 꽃무늬 등의 금박을 장식하였습니다. 전복 위에는 붉은색 전대나 십장생 무늬를 수놓은 붉은색 돌띠를 매었는데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12개의 작은 염낭에 곡식을 담아 매달면서 부귀영화를 기원 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지

두루마기 안에는 바지저고리를 입는데 두루마기 없이 저고리만을 입을 때는 등에 닿는 저고리 고름 부분에 수놓은 장식 조각을 붙여서 저고리만 입을 때의 아름다움도 배려하였습니다.

 

바지는 용변을 처리하기 편하도록 뒤를 트고 밑을 판 풍차바지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바짓부리에는 남색의 대님을 달아 부리를 묶기 편하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오목이' 라고 하는 누비 타래버선을 신겼는데 곱게 누비거나 솜 을 둔 버선의 발등에 가득 찬 화려한 색상의 자수 장식과 버선코의 실 방울 (絲花) 장식이 귀여웠습니다.

 

버선목에 역시 남색 버선 끈을 달아 벗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 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서양 남자의 조끼가 우리 옷에도 입되었는데 아이들의 옷으로도 입혔습니다. 단추와 단촛구멍을 만든 남색 조끼에 금박을 찍어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였습니다. 또 조끼 위에는 색동마고자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이것 모두 만든 이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담긴 옷으로, 무 병장수와 출세를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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